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 (문단 편집) === 애매한 선전(宣戰) 내용 === 이 선전포고문에 관여한 일본 제국의 외교관들중 한명이 카세 토시카즈였는데, 패전 직후 미주리 함 조인식에 [[시게미츠 마모루]] 이하 항복사절단의 일원으로 동행하기도 하였다. 패전 이후에도 멀쩡히 일본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훗날 한술 더 떠서 그의 아들은 헤이세이 연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극우논객계 거두로 두각되기 시작한 카세 히데아키다. 자세한 것은 [[일본 우익사관/학자]] 참조. 토시카즈는 이런 애매모호하고 포고문같지도 않은 메시지를 작성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 (상략) … "'''군부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기습'''이었습니다. 해군은, 전쟁은 이기기 위하여 하는 것이라며, 자기들의 본심인 진주만 공격이 가급적이면 드러나지 않는 내용을 원했습니다. 대미각서의 말미에 넣은 ‘교섭의 타결은 불가능’이라는 문구도 처음에는 반대할 정도였습니다. 개전통고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지요. 따라서 정식의 선전포고문을 내밀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 >… (중략) … "당시에는 국제법학자인 요코다 기사부로(橫田喜三郞) 동경대 교수에게도 상담한 것입니다. 요코다 교수는 대미각서를 [[헐 노트]](Hull note)[* 1941년 11월 26일 헐 장관이 일본에 전달한 미국 측의 제안서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중국으로부터 모든 일본군을 철수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측은 이 부분을 최후통첩으로 판단했다.]와 함께 읽어본 뒤, 법학자의 입장에서 봐도 '''이 정도면 ([[최후통첩]]으로 봐도)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기습성공을 노리는 해군 당국과 도고 외상이 격론 끝에 합의한 내용이라서, 그 이상 선전포고의 의도를 명문화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즉, 애초에 일본은 헐 장관의 노트를 미국의 최후통첩이라고 판단해, 최후통첩의 내용을 일본이 지키지 않은 이상 '''이미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했으니 일본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좋을 대로 결론을 내려버렸고, 그 결과 이런 애매한 문서가 탄생한 것이다. 미국에게 제대로 된 선전포고인지 아닌지 모를 문서를 공습 예정 시간이 거의 다 돼서야(그것도 결과적으로는 뒤늦게)[* 훗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이에 대해 '개전 조약에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그랬다'는 핑계를 댔다.] 내밀어서, 그만큼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속셈은 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